1989년, 대학에 갓 입학한 시골촌뜨기 나는 서울로 올라와 정신못차리는 시기였다.
서울은 가만히 있어도 코베어간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그리 친근감이 있는 도시는 아니었다.
1학년때는 많은 변화속에 왜 그렇게 계절을 많이 탔는지도 모르겠다.
외삼촌댁에 더불어 살았는데 외삼촌과 외숙모는 정말 의지가 있고 신앙이 깊었던 분이었다.
외삼촌은 지금은 목사님이 되셨다.
역경을 이겨내고 꿈을 이루신 존경스러운 분이다.
그때 외삼촌이 내 의지와는 다르게 교회 수련회에 반강제로 끼워 넣었는데 내가 교회 문화를 조금도 몰랐고 다들 챙겨줄려고 했지만 너무 어색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어리숙한 내가 안돼 보였을까? 그곳에서 서울말을 쓰면서 먼저 손을 내민 성미를 처음 만났다.
나의 20대! 이 친구 김성미를 빼놓고 이야기 할수 없다.
뭐가 그리 고민도 많았는지?
심심하면 서로 연락을 주고 받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고민 아닌 고민거리로 안주 삼아 자주 만났다.
군 복무를 서울에서 했던 나는
종종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면회를 자주 오기도 했고,
전역 후 복학한 뒤에도 자연스럽게 연락이 이어졌다.
그녀는 내 대학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당시 그녀는 사업가적 기질도 있어 보였다.
피아노 학원도 했고 어린이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도전의식이 있었고 그런 분야에 탁월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녀가 결혼후에도 그녀의 남편과도 우리는 좋은 만남을 이어갔고 정말 재밌게 보냈다.
졸업 즈음 IMF가 터졌고,
나는 취업을 위해 대구로 내려가게 됐고 나도 결혼도 했고 그렇게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한 번은 휴대전화가 문제가 있었는지 그녀의 번호가 없다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는 정말로 연락이 끊겼다.
오래전이지만 한 번은 부산 시댁에 갔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그녀가 전화를 준 적이 있었다.
목소리는 여전했고, 반가웠지만 크게 내색하지 못했고 그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그녀의 남편 번호를 알았는데 몇 번 시도해보았지만 답이 없었고 그 후로는 전화번호가 완전 바뀌었는지 다른 사람이 받았다.
그게 벌써 25년 전 일이다.
10년 전쯤, 서울 사촌의 결혼식에 갔다가
그녀가 운영하던 후암동 어린이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주변분의 말로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민을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그날 이후 그냥 20대의 추억으로 잊혀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는데도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 없다.
기억 중의 그녀와 약속을 한 것이 하나 있다..
2000년 ○월 ○일, 낮 12시.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
그때 우리는 거기서 만나기로 했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녀가 실제로 나왔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그녀도 안 나왔을 것 같은 느낌이다.
둘 다 가정이 있고 바쁘게 살았을것 같다.
그녀는 내 20대 가장 친했던 가장 그리운 여사친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사친은 없다고 하지만 나는 그런 여사친이 있다.
그 옛날처럼 그녀와 소주도 한잔하고 싶다.
혜화동 동숭교회와 그 일대
죽기전에는 반드시 연락을 올 것 같은 친구다.
연락할 길 없으면 회사로도 전화할 것 같은 친구!
친구야! 너를 한 번 보는게 나의 버킷리스트중의 하나다.
💬 따스로그의 한마디
“사진은 없어도 기억에 존재한다.
사라진 인연도 마음속에 오래 머문다면,
그건 결코 헛된 인연은 아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