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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스로그 #2]말 없는 가르침, 삶으로 보답한 제자 – 어른 김장하와 문형배

어른 김장하선생


광주독립영화관에서 조용히 상영된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 관객들이 숨죽여 지켜본 이 영화는 단순한 전기(傳記)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이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고, 다시 사회로 되돌아오는지를 보여주는 **'선순환의 초상'**이었다.


🍂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도 안 하셨습니다”

1980년대 말, 경남 진주의 한약방 3층. 고등학생 문형배는 떨리는 마음으로 작은 봉투 하나를 받았다. 누가 준 것인지, 어떤 조건이 붙었는지도 모른 채 건네받은 김장하 선생님의 장학금이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문형배는 물었다.

“정말 아무 조건도 없습니까?”

김장하 선생님은 미소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

“공부 열심히 하라는 말도, 나는 하지 않는다.”

그 말이 낯설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자신을 믿는다는 침묵,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격려였다.

세월이 흘러 문형배는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이라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많은 이들이 성공 비결을 묻지만, 그는 단 하나의 문장을 남긴다.

“내 삶의 기초는, 그 장학금 봉투 하나였습니다.”

윤형배 전헌법재판관

🍂 “명신고를 나라에 기증한다”

1991년, 김주완 기자는 경남의 한 신문기사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사립 명신고등학교, 설립자 김장하 씨가 국가에 기부채납.”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선생님은 단칼에 거절했다. 그 대신 학교 앞에서 스치듯 나눈 짧은 대화.
기자는 물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김장하 선생님은 버스를 기다리며, 가볍게 말했다.

“학교는 내 것이 아니니까요.”

그 학교는 이후 수많은 학생을 길러냈고, 그들 중 일부는 검사가 되고, 교사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그 학교 어디에도 새기지 않았다.

“내가 만든 건 맞지만, 내가 가져야 할 이유는 없잖나.”

이후에도 그는 자전거를 타고, 한약방 3층에서 거주하며, 전국에서 가장 조용한 ‘부자’로 남았다.


🌱 그들은 말하지 않았다, 다만 살았다

김장하 선생님은 영화 시사조차 거절하며 말했다.

“내가 나오는 영화를 내가 왜 보나. 그건 피디 영역이지.”

문형배 재판관도 훈장을 수여받을 때마다 고개를 숙인다.

“그 훈장은 제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받은 장학금이 만든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그 조용한 울림은 많은 사람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어른

진주시는 김장하 선생님의 옛 한약방을 역사관으로 바꾸고 있다.
하지만 선생님은 처음엔 거절했다.

“내 이름 걸린 건 하지 말아요.”

대신 형평운동과 소년운동, 진주 한약방의 역사를 담는 공간으로 만든다는 설명을 듣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문형배 재판관은 2024년 기준, 공개된 재산이 약 15억 원으로 고위 법조인 중 비교적 검소한 편이다. 그의 검소한 삶은, 자신이 받은 장학금의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다시는 누군가가 나처럼 힘들게 학비를 고민하지 않길 바란다.”


📝 따스로그의 시선

김장하 선생은 침묵으로 가르쳤고, 문형배 재판관은 삶으로 그 가르침에 답했다.
이 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 말을 걸 것인가?”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기억에 남는 삶은
언제나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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