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난 속에서 피어난 꿈
이태석 신부는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열 명 남매 중 아홉째로, 어린 시절부터 가난은 그에게 자연스러운 배경이었다.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항상 굶주림과 싸워야 했지만, 그 속에서도 배움에 대한 열정만큼은 꺾이지 않았다.
가난을 이겨낸 그는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했고, 군의관으로 복무하던 중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진정한 치유는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어루만지는 것'이라는 깨달음은 그를 사제의 길로 이끌었다. 의사로서의 삶도 귀했지만, 그는 더 깊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1991년 살레시오회에 입회하고 신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2001년 사제로 서품을 받고, 의사이자 신부로서 아프리카 남수단 톤즈(Tonj)로 떠났다.
2. 아프리카로 가게 된 이유
아프리카는 이태석 신부에게 단순한 봉사의 땅이 아니었다. 그는 평소 ‘가장 버림받은 곳으로 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내전으로 폐허가 된 수단, 특히 남부 지역은 의료는커녕 기본적인 교육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병원은커녕 제대로 된 약도 없고, 아이들은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한 채 병과 가난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누군가 그들을 위해 살아줘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에 이태석 신부는 직접 답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남수단 톤즈 마을로 향했다.
3. 톤즈에서의 삶
의료 활동 – 환자의 손을 잡아준 의사
톤즈에서 이태석 신부는 ‘의사’였다.
주민들은 사소한 감기부터 심각한 말라리아, 한센병(나병), 장티푸스 등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신부는 직접 진료소를 열어 환자들을 치료했다. 무릎을 꿇고 어린아이의 상처를 씻어주고, 손이 문드러진 나병 환자의 손을 맨손으로 잡았다. 톤즈 사람들에게는 생전 처음 받아보는 인간적인 치료였다.
“진료비는 없습니다. 고맙다는 말도 필요 없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돈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약이 부족할 때는 자신의 생활비를 털어 약을 사오기도 했다.
환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약이 아니라, ‘당신은 소중한 존재입니다’라는 메시지였다.
교육 활동 – 아이들의 미래를 바꾼 교사
그는 단순한 치료에 머물지 않았다.
“병을 고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미래를 바꿔야 한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을 모았다. 영어, 수학, 과학을 가르쳤고, 무엇보다 ‘꿈’을 심어주었다.
아이들은 그의 수업을 통해 ‘배우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음악 활동 – 브라스 밴드의 기적
특히 톤즈 마을에 '브라스 밴드'를 만든 일은 큰 전환점이었다.
신부는 한국에서 직접 악기를 들여와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쳤다. 트럼펫, 트롬본, 튜바를 처음 접하는 아이들은 악기를 부는 법조차 몰랐지만, 신부는 차근차근 기다려주며 가르쳤다.
음악은 아이들의 자존감을 세워주었다.
전쟁과 가난 속에서 움츠러들었던 아이들은 연주를 통해 웃기 시작했고,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을 자랑스러워하며 처음으로 미래를 기대하게 되었다.
톤즈 마을에서는 축제나 행사 때마다 아이들의 브라스밴드가 등장했다. 울려 퍼지는 음악은, 총성만 가득하던 그 땅에 새로운 희망의 울림이 되었다.
4. 그리고 죽음
2008년, 건강 검진을 위해 귀국한 이태석 신부는 대장암 4기 진단을 받는다. 이미 간과 폐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그는 톤즈로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병세는 빠르게 악화됐고, 결국 2010년 1월 14일, 48세의 젊은 나이로 선종했다.
그의 죽음은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그리고 죽음 이후, 그가 톤즈에 심은 사랑의 씨앗은 기적처럼 자라났다.
그가 키운 아이들 중 57명이 의사와 약사가 되었다.
그중 몇몇은 한국으로 유학을 와 의학을 전공했고, 그들은 다시 톤즈로 돌아가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
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진료 방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환자의 손을 잡아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눈을 맞춘다."
그의 가르침은, 단순히 의술을 넘어 사랑과 존엄을 전하는 치유의 방식이었다.
특히 이태석 신부를 소재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와 『부활』은 한국 사회에 큰 감동을 주었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기부에 동참했고,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그의 삶은 죽음 이후에도 수많은 이들의 삶을 바꾸고 있었다.
5. 우리에게 남겨진 것들
이태석 신부는 거창한 이상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작은 사랑을 매일 실천하는 것"이 진짜 세상을 바꾼다고 믿었다.
그가 남긴 것은 거대한 병원이나 학교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 속에 심어진 ‘따뜻한 사랑의 기억’**이다.
그는 떠났지만, 톤즈에는 오늘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환자의 손을 잡아주는 의사들, 아이들의 꿈을 키우는 선생님들,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있다.
그의 부활은 단지 신앙적 의미에 그치지 않았다.
이태석 신부의 부활은, 그의 사랑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6. 따스로그의 시선
우리는 종종 ‘무엇을 성취했는가’에만 주목한다.
하지만 이태석 신부의 삶은 다르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그의 생애는, 가난하고 버려진 이들 곁에서 무릎을 꿇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위대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던져 사랑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죽음조차 막을 수 없는 생명의 물결이 되어 오늘도 흐르고 있다.
우리도, 그의 부활에 동참할 수 있다.
일상에서 작은 사랑을 실천하며, 소외된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태석 신부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유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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