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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스로그 #3] 강상호 선생 – 백정 인권을 위해 몸소 뛰어든 진정한 자유의 외침

1920년대, 시대의 편견과 불의에 맞선 한 인물이 있었다. 강상호 선생은 감옥에서 출옥한 후, 자신을 백정 출신으로 낙인 찍힌 이들의 인권 구호를 외치며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다. 그의 삶은 말없이, 그러나 뜨겁게 타올라 당대 조선 사회의 부조리와 차별을 깨뜨리려는 의지의 불꽃이었다.


백정 인권, 그 불의에 맞선 결연한 외침

1923년 4월 24일, 강상호 선생은 백정 출신의 장지필, 이학찬 등과 함께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하며 초대 사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백정 차별은 부당하고 불의하며 조선 전체의 해악”이라는 신념 아래, 백정 인권 보호와 생활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백정들의 생활을 개선시키지 않고 한 인간으로 사는 것이 위선이며,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인들끼리 차별하고 탄압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식민통치를 돕는 어리석은 일이다."
이와 같은 선언은 당시 사회의 고정관념과 편견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특히, 강상호 선생은 자신의 믿음을 몸소 실천했다. 백정의 아이 둘을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켜 학교에 입학시킨 이야기는, 단순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이어진 따뜻한 사랑의 증거로 남아 있다. 그가 투자한 재산과 노력은 오랜 세월에 걸친 차별의 굴레를 깨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게 만든 발판이 되었다.


형평운동, 그리고 가혹한 반발의 순간

백정 인권 보호를 외치며 형평운동을 이끌던 강상호 선생에게는 고난의 순간도 많았다.
1923년 5월 25일, 형평사 근처 술집에서 탁윤환이라는 인물이 “백정 놈들에겐 밥을 팔더니 나한테는 술이 왜 없다고 하는가”라는 고함을 지르자, 형평사 사람들은 분노에 휩싸여 탁윤환을 폭행했다.
동아일보 1923년 5월 30일자 기사는 그 날의 사태를 생생하게 전하며, 강 선생이 이끄는 운동이 당시 얼마나 도전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사건은 단순한 언쟁을 넘어, 백정에 대한 수백 년간의 차별과 억압이 하루아침에 바뀌기 어렵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고, 강상호 선생은 그러한 현실에 맞서 더욱 굳건히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다.


투자와 헌신 – 평등한 인간을 위한 투쟁

강상호 선생은 인권 해방을 위한 자신의 헌신을 위해 재산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1924년 4월 25일 개최된 형평사 발기총회에서 임시의장 및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8월 11일 진주노동공제회 집행위원회에서 회계를 맡았다.
또한, 신간회 진주지회 간사와 위원으로 활동하며, 사립 일신고등보통학교 설립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다양한 사회운동에 몸담아, 한 인간의 작은 힘이 어떻게 사회 전반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러나 시대의 격변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강상호 선생은 서울에 설립된 형평사와 진주 형평사 사이에 벌어진 마찰로 인해 운동의 방향이 친일 쪽으로 기울자 단호히 발을 빼는 어려운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그의 신념은 오직 ‘인간은 저울처럼 평등하다’는 한마디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친일 행각에 연루된 조직과 단절하며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


해방 후의 고난과 다시 찾은 삶

일제의 굴레를 벗어나 8.15 광복을 맞은 후, 강상호 선생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해 1946년 초 진주 3.1 동지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회갑연에서는 수십 명의 채무자들을 초대하고, 자신의 부친 강재순의 이름으로 보유했던 모든 채권을 포기하며 그들 앞에서 계약서에 불을 질렀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금전적인 손실이 아니라, 당시 서민과 소외된 이들을 위한 진정한 나눔과 회복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강 선생의 길은 평탄하지 않았다. 좌익 인사로 간주되어 특무대나 경찰서에 연행되는 일이 빈번했고, 6.25 전쟁 직전에는 정부의 압력과 보도연맹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위험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다.
동생 강영호는 보도연맹 학살사건에 휘말려 처형당하는 비극도 겪었다.

전쟁이 끝난 후 진주로 귀환한 강상호 선생은 한때 진주 인민위원장을 맡았다는 소문에 시달리며, 당국의 반복되는 조사를 받기도 했고, 말년에는 불우한 삶을 보냈다. 결국 1957년 12월 29일, 그의 마지막 숨이 세상을 떠났고, 장례식 날 전국의 백정 출신 인사들이 모여 9일장을 치를 정도로 그의 발자취는 깊은 울림으로 남아 있다.

옛 형평사원들은 그를 이렇게 기억한다.

"오직 선생님만은 그 시대의 속칭 양반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신분의 명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희사해 가며 우리들의 고독한 사회적 지위의 인권 해방을 위해 선봉에 나서셨으며, 자유 인권 평등과 치학의 개방, 그리고 50만 동포를 위해 주야고심 투쟁하셨습니다. 위대하십니다. 장하십니다."


따스로그 시선

독립운동가 강상호 선생은 단순히 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삶은 백정이라는 사회적 낙인을 넘어, 한 인간 한 인간이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깊은 신념과 실천의 기록이다.
불의에 맞서고, 차별에 대항하며, 나눔과 투쟁으로 민중과 함께 걸어간 그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울림을 준다.

이 시대에 다시 한 번, 그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가 나누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그는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우리는 서로를 평등한 한 인간으로 대하고 있는가?”
강상호 선생의 삶과 그 뜨거운 외침이 영원히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오늘의 사회를 더욱 따뜻하고 정의롭게 만드는 힘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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